엉덩이 종기에 딱인 추억의 '검은 약'...좋은 환경 덕에 사용 줄어

2010년 당시 서울 충정로의 이명래 고약집. 지금은 식당으로 바뀌었다. [사진=김길]
2010년 당시 서울 충정로의 이명래 고약집. 지금은 식당으로 바뀌었다. [사진=김길]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망했다’라는 제호를 쓴 것을 상표권을 가지고 계신 분께 사과드린다. 최고의 약은 더 이상 치료할 환자가 없는 약,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 약이라는 생각이 있어 ‘망한 명품’이란 표현을 과감히 써 봤다. (요즘 젊은 사람들 표현인 ‘어그로’… 그거 맞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에서 종근당빌딩 쪽으로 나오면 오래된 동네가 나온다. 오래됐으나 예전에 좀 살았던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 같은 동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이태리식당이자 미술관인 ‘충정각’이다.

100여 년도 넘은 오래된 포르투갈 스타일의 근사한 건물이다. 10여 년 전까지 그 건물을 돌아 나오면 ‘이명래 고약’ 간판이 달린 집을 볼 수 있었다. 지난 2011년 선술집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 중에 있다. 2011년까지 15년 정도 빈집으로 있었다는 글을 보면 꽤 오랫동안 빈집으로 있었던 것 같다. 

필자는 면역력이 약해서인지 어릴 적부터 몸에 종기가 잘 났다. 모기 물린 자리가 종기로 바뀌는 일도 많았다. 그걸 본 어르신은 약국가서 ‘이명래 고약 사 와라!’ 라곤 하셨다.

‘고약’도 아닌 ‘이명래 고약’. 고약했던 그 약은 불로 데워서 썼는데 불로 데우는 과정부터 무시무시했고, 뜨거운 약을 상처 있는 종기에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거무튀튀한 그 약을 며칠 동안 붙이고 다니면 영 없어 보여서 그 약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날, 어린 시절이 지나고 청년을 지나 장년으로 지나던 그 싯점에 그 고약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충정각’을 찾다 그 오래된 간판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이명래 고약’은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에밀 드비즈 신부)가 창업자 이명래 선생에게 전해준 비법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그 선교사의 이름을 따서 ‘성고약’이라 붙였다. 이명래 선생은 ‘성 고약’을 들고 충청도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효능을 실험했다고 한다. 

약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약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약방을 만들어 ‘이명래 고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20년, 3·1운동 이듬해의 일이다. 이 약은 활명수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에게 잘 맞는 토종 약이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약이었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다. 

고약은 지금의 ‘파스’와 비슷한 성격의 붙이는 약이다. 여려 약재를 달여 응고시키고 딱딱해지면 불로 데워 환부에 붙여 사용하는 형태의 약이다. 고름이 있는 종기에 효과가 좋은데 고름만 쏙 빼내어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염증, 종기, 볼거리 등 면역력과 관련이 깊다고 나와 있다.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위생 상태까지 좋지 않으면 깊이 감염된다. 여기에 당뇨 등의 만성 질환이 있다면 치명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도 젊은 시절부터 고생하다 나이가 들어서는 못 버티고 죽었다고 한다. (문종, 성종, 효종, 정조 등)

역으로 고약이 필요한 환경을 정리해 보면 ‘가난’, ‘면역력’, ‘만성질환’ 이 세 가지와 관련이 깊다. 세 박자가 맞으면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 된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고약’이 많이 쓰였다. 버스 기사분이 틀어 놓은 라디오 광고에 ‘종기엔 이명래, 이명래 고약’이 자주 나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명래 고약’의 존재를 떠올리며 궁금해하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 이유를 찾아 보니 과거와 같이 비위생적이지도 않고 항생제도 발달해서 종기가 잘 생기지 않아 ‘이명래 고약’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처럼, 우리의 위생 상태가 좋아지고 면역력이 좋아지지 않았다면 이 약을 계속 찾았을 것같다.

필자가 인도에 있을 때 풍토병으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위생과는 상관없이 그 동네 토종 벌레에게 물렸는데, 물린 자리의 상처가 짖무르면서 주위로 번져 갔다. 그 병을 치료한 곳은 병원이 아닌, 동네 약국이었다. 연고를 하나 뚝딱거리고 만들어 주면서 가서 바르라고 했다. (먹는 약도 주긴 했는데 후일 찾아 보니 병과는 상관없는 영양제였다.) 약을 바른 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깨끗해진 경험이 있다.

더 생각해 보니 이 약을 찾는 이가 줄어든 것은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좋은 약 때문에 환자가 줄어드는 격 아닌가? 아전인수일지 모르겠지만 이 약을 찾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 시절 일상에 꼭 필요한 명품이었고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했던 약이었기에 하는 이야기다. 참고로 저렴한 가격으로 ‘이명래 고약’을 대량 생산을 했던 ‘명래 제약’은 2002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다른 제약회사가 판권을 인수해 지금도 생산하고 있다.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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