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안좋거나 키패드 조작시 편의위해 마련한 디자이너들의 '숨은 배려'

 [일러스트=프리픽]
 [일러스트=프리픽]

지금 사라진 버튼식 휴대폰들, 전화기들… 

혹시 기억하는지 그 전화기에는 최소 12개의 버튼이 있었다. 1, 2, 3, 4, 5, 6, 7, 8, 9, 0, *, #. (지금 스마트폰에서 사용하고 있는 천지인 자판도 그 순서에서 왔다. 그 버튼의 정가운데는 5자 버튼이다.)

혹 집에 그런 물건들이 남아 있다면 5자 버튼이나 그 주변을 만져보라. 작은 점 하나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은 플라스틱 사출을 할 때 찌꺼기 같은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플라스틱 사출물 찌꺼기를 잘 모르겠다면 생수병 바닥을 만져보라. 공장에서 병을 만들 때 플라스틱이 주입되던 포인트인데 다른 곳과 쉽게 구별이 된다. 그 포인트는 주변 두께 약간 두껍고 딱딱하다. 두께다 다르다 보니 식을 때 모양이 틀어지는 문제가 있다. 그리서 병 윗쪽이나 옆도 아니고 바닥에 포인트 지점을 만들어두고 모양을 넣어 처리한다.

옛날 싸구려 제품에는 플라스틱 찌꺼기들이 많이 있었다. 뜨거운 플라스틱 액이 금형(일종의 거푸집) 밖으로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오래된 금형일수록, 플라스틱 제조 기술이 떨어질수록 그 흔적들이 많이 생겼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제품을 거의 볼 수 없지만 중국이나 인도의 시장에 가면 그런 조악한 물건들이 남아있다.

1990년대 초의 이야기다. 산업계 전반이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였고 아마 일본을 따라가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많았던 시절이다. 당시 사용하는 전화기 숫자 패드에 사출점 같은 작고 날카로운 점이 있었다.

인디아마트 캡처, 마감이 잘 안되면 끝 부분이 날카로워 진다.
인디아마트 캡처, 마감이 잘 안되면 끝 부분이 날카로워 진다. [사진=김길]

당시 우리나라 사출기술이나 제품 생산 후 마감하는 기술이 일본만 못했기 때문이라 그런 찌꺼기가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세심하게 관리하지 못하니 우리나라 제품이 2류 제품으로 취급 받는다고 이야기 하곤 했다. 

당시 일본의 플라스틱 제품의 제조사는 이런 미세한 부분이 보이지 않게 설계 때부터 금형의 결합라인을 고민했고, 완벽한 생산품이 나올 수 있는 보완 장치들이 많았다. 지금 우리가 사용 중인 PET병부터 플라스틱 의자, 플라스틱 바구니까지 유럽의 고가 제품을 저렴한 플라스틱으로 바꾼 것은 일본 제품들이었다. 

필자가 디자이너가 되어 처음 한 일은 일본에서 가져온 플라스틱물을 캘리퍼스로 측정하며 도면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잘 베껴야 한다의 정확한 표현은 모양은 비슷하나 달라야 하나, 성능은 같거나 더 좋게 였다. 그리고 빨리 단 시간내에…)

당시 잘 베끼지 못으면 선배한테 혼이 났다. 그 선배는 일본 연구진들이 그 값을 선택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며 놓치지 말고 베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대충 모방하면 생산 후에 형태가 뒤틀리기도 하고, 조립할 때 결합이 잘 안되는 일도 발생하고, 그 책임을 디자이너가 져야 한다고 협박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우선은 완전하게 베껴야 하는데 그들의 실수한 부분도 베끼기까지 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다시 5자의 점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금 전화기에서 숫자를 입력하는 기능을 가진 제품은 거의 사라졌다. 리모콘 또는 숫자 입력이 잦은 분들을 위한 키패드 정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서 키패드는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니 디자이너들이 신경을 많이 쓴다. 특히 손 끝을 이용해 입력해야 하니 키 디자인을 오목하게 할지, 볼록하게 할지부터 소재까지 다양한 고민을 한다.

Bang & Olufsen Beocom 1000 (1986년 제품), 5자에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김길]
Bang & Olufsen Beocom 1000 (1986년 제품), 5자에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김길]

우선 오목하게 하면 손이 닿는 오류는 적어지고 사용자도 좋은 키보드라는 인식을 한다. 그래서 초기 디자인은 키 가운데가 오목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키 주변의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되고 생산 기술도 난이도가 조금 있는 편이다.

반대로 볼록하게 디자인하는 경우에는 플라스틱이 식으면서 약간의 수축이 발생하는데 재질마다 그 정도를 미리 가늠하기가 어렵다. 대체적으로 사용빈도가 높고 약간 고가의 제품은 오목, 크기가 작고 평이한 물건은 볼록 자판이 많았다. (물론 어떤 경우의 제작 방식이건 생산부서에서는 새로운 시도자체를 싫어한다.)

그런데 오래된 전화기나 리모콘을 보면 5자에 사출 흔적 같은 점을 찾을 수 있다. 손톱으로 뜯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포인트가 있는 것부터, 5자 주변에 돌기 같은 것도 만들어 둔다. 그 포인트는 플라스틱 생산기술이나 품질관리와 상관이 없다. 잘 보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 포인트는 시력이 낮은 사람들이나 손으로만 키패드를 조작할 때 생기는 오류를 보완하는 보조 장치다. 신입 디자이너 시절, 필자의 생각이나 경험이 부족해서 그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많던 선배를 통해서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 자국을 없애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도된게 아닐까? 가령 눈감고 만져도 말야…”

필자는 그때까지 돈 되는 일, 모양을 이쁘게 하거나 편리하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지 그런 생각, 그 제품을 이용하는 다수의 이용자에 대한 편리를 생각해 보지 못했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만든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2020년 생산된 만능 리모콘의 키패드에는 점이 없다. [사진=김길]
2020년 생산된 만능 리모콘의 키패드에는 점이 없다. [사진=김길]

그 후 길거리의 공중전화부터 고급 제품들의 키패드를 유심하게 쳐다봤다. 그제서야 5자 키패드에 그 점들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점들은 묵묵히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사람들을 위해 고심한 유쾌한 신호처럼 보였다. 당시 디자인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B&O 전화기의 키패드에도 점이 있었다. 반대로 싸게 생산되는 물건에는 그 흔적이 없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실수까지 베껴야 한다는 선배의 말이 옳았다. 더 많은 월급 받으며, 더 오랫동안 고민했던 그들의 생각을 모르면 차라리 베끼는 것이 나았다. 물론 당시 필자나 그 선배나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는 많지 않았던 시대라는 핑계를 대본다. 그리고 물건을 만들어 싸게만 내 놓으면 팔리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생각은 사치였을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마음, 특히 지금의 이익, 나의 이익과 상관없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따뜻했다면 보였을 부분이기도 했다. 

 키보드 F나 J 자판에는 돌출된 선 모양의 홈이 있다. [사진=프리픽]
 키보드 F나 J 자판에는 돌출된 선 모양의 홈이 있다. [사진=프리픽]

 

스마트폰의 출현 후 5자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쿼터 키보드나 숫자입력을 위한 키패드에는 아직 남아있다. 자판의 'F 또는 ㄹ'과 'J 또는 ㅓ'자리에 있는 작은 점, 그리고 키패드에 남아 있는 작은 점이다.

지금 검색창에 ‘키패드’라고 넣고 검색해 보라.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많은 제품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잇다. 이젠 불필요한 기능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더 이상 필요없는 '오랜 기계의 흔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드나 마나 '돈이 안되는 그런 일'에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기고싶어 글을 적는다. 점을 넣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한 이름모를 디자이너, 그리고 그 디자인을 승인한 의사결정자에게 멋진 사람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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