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노동자 사망 사고,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부쳐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나가는 일터가 삶을 앗아가는 공간이 되는 현실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사진=민주노총]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나가는 일터가 삶을 앗아가는 공간이 되는 현실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사진=민주노총]

언제부터인가 본래 명칭보다 '기레기'라는 유쾌하지 않은 수식어에 더 익숙해져온 이들이 있다. 필자를 위시한 수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이 그 장본인이다. 누구보다 앞장 서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운다는 사명감으로 업을 이어온 입장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상당수 대중들은 그 표현이 크게 잘못 된 건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는 모양이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이유 없는 무덤은 없는 법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언론매체가 급격히 늘면서부터 제대로 트레이닝 되지 않은 기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라떼'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예외로 하자. 우리 때는 정말로 그랬으니까. 필자가 기자 초년병이던 그 시절은 원고지 2매짜리 단신 기사에 오타가 서너 개 있다는 이유만으로 날아오는 볼펜이나 원고지 뭉치를 피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사정이 그러니 기사 내용이 불성실하다면 상황은 훨씬 더 나빴을 것은 당연지사(재떨이가 얼마나 위협적인 흉기인지를 몸소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배우고 익히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자신의 바이라인(by-line.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에 기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단 기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모양이다. 기자라는 업을 가진 이가 썼다고 믿기 힘든 수준의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과장 조금 보태면 초등학생이 작문한 것 같은 그런 기사들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다.

불분명한 논지, 문장 자체의 조악함은 둘째 치고 누가 봐도 의도성 농후한 그런 기사에 OOO 기자라는 바이라인이 매달려 있는 걸 보게 되면 필자 스스로도 기자라는 이름을 당장 떼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니 대중들은 오죽 할까 싶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필자는 대단한 기자쯤 되나 하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특히 노동관련 기사를 쓰면서는 더더욱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동자 안전사고를 다룬 기사를 쓸 때다.

새롭다는 의미의 뉴스를 보도하지만 실상은 전혀 새롭지 않은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탓이다. 몇 년 전 썼던 원고를 끄집어내 날짜와 직종, 지역만 바꾸면 별 문제가 없는 그런 일을 하면서 기자라는 자부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아진다.

문득 수십 년 전 본 영화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세기말의 신데렐라도 불리는 줄리아 로버츠의 1994년 영화 <아이 러브 트러블>에 등장하는 '시카고 크로니클'의 고참 기자 닉 놀테는 PC로 옛날에 써놓은 자기 칼럼을 검색해 재탕하는 장면을 선보인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 극중 플롯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히 뇌리에 남아있다. 

 [일러스트=픽사베이]
 [일러스트=픽사베이]

당시만 해도 참 무책임하다 싶은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의 필자 역시 그런 일을 부지불식간에 하고 있는 걸 보면 기레기란 욕을 들어도 딱히 변명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굳이 변명 나부랭이를 늘어놓으려는 이유는 정말 이 사회를 밝게 만들려 노력하는 수많은 진짜 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직종, 날짜, 이름만 바꾸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안전사고


‘연말연시부터 잇따른 노동자 사망사고… 노동청 수사’, ‘이틀 사이 노동자 사망 사고 4건 발생… 중대재해 위반 여부 조사’, ‘경비원·일용직 등 연말 노동자 사망 사고 잇따라’

인터넷 검색창에 ‘노동자 사망 사고’란 키워드를 집어넣자 주르륵 딸려 나오는 내용들이다. 보는 순간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는 헤드라인인 동시에 데자뷰를 느끼게 해야 옳은 내용이다. 정상적이라면 그래야 했다는 말이다. 데쟈뷰, 즉 기시감이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사정이 달라진다. 이건 데자뷰가 아닌 팩트의 문제인 탓이다. 몇 달 전에도 그랬고 1년 전에도 그랬고 5년, 10년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던 사건인 것. 더 놀라운 것은 헤드라인 자체도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다. 번거롭게 인터넷으로 검색할 필요도 없다. 믿어주시라. 그래도 못 믿겠다는 분들을 위해 검색창을 활용해보았다. 

2004년 조선업 호황 속 노동자 사망사고 잇따라, 2016년 ‘조선업 대형3사 사망사고 78%가 하청노동자, ’2017년 올해 조선업 사망사고 '100% 하청노동자', 2019년 조선업 사고사망, 하청 노동자 84.4%, 2022년 조선업 사망사고 70%는 '하청 노동자'.."원청 역할 중요"

성정이 게으른 탓에 더 이상 스크롤이 힘들어 포기한 게 이 정도다. 조금만 부지런한 이라면 거의 동일한 헤드라인을 단 기사를 수십, 수백 개는 검색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놀라운 건 헤드라인의 동일성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 기사에 쓰여진 문장 역시 대동소이한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장 하나만 추려보았다. 

‘전체 사고사망자 중 하청노동자가 XX.X%를 차지해, OO업에서 위험의 외주화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정부 당국은...

사건의 규모가 클수록 호들갑은 요란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차제에 법을 만들고 제도를 강화한다는 말이 뒤따랐던 것 역시 당연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일은 반복된다. 이곳에서 이유가 무엇이고 대책이 무엇인지를 논하지는 않겠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나처럼 하청 노동자들처럼 힘없고 약한 노동자들은 험하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고 그러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생명을 박탈당하는 과정을 되풀이해간다. 2024년에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웃는 얼굴로 올랐던 출근길이 가족과의 마지막이었다는 클리셰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달까. 

앞 이야기로 돌아가자. 매번 반복되는 비극적인 안전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기자는 당연히 관련 소식을 보도할 의무가 있다. 이를 알림으로써 느슨해진 안전 의식에 경각심을 불어넣고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각종 액션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기사를 올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원치 않는 불성실함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전개된 사고이기에 이를 보도하는 기자가 작성하는 헤드라인도, 본문도 거의 비슷한 행태를 띨 수밖에 없게 되는 것. 아마 그 결론 역시 매번 그랬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내질 것이다. 노동자 사망사고를 막기 위한 보다 더 강력한 법·제도적 장치마련과 위반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내용들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써오며 해왔던 루틴이었다. 따지고 보면 직종을 바꾸고 사망자비율도 고치고, 날짜를 수정한 후 사망자 이름만 대체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하청노동자들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별 고민도 없이 돌려쓰고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싸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변명 같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청노동자들의 죽음과 위험의 외주화를 뿌리 뽑지 못하는 한 이 땅의 수많은 기자들은 내일이면 또 다시 비슷한 패턴, 유사한 내용을 담은 글들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 정말 쓰고 싶지 않은 글이지만 동시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글이기도 한 탓이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더 이상 '돌려쓰기'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연이은 지적에도 변하지 않는 구조가 계속된다면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지난 번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재탕 수준의 기사로 올려질 수밖에 없다. 슬프지만 그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래도 올해는 다르겠지. 아니 달라야 한다. 그게 소중한 누군가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손영남 칼럼니스트
손영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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