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 택배기사 보호하는 간단한 방법

늦은 저녁 남의 차를 모는 이유는 하나, 그 사람이 가장이기 때문이다. 가장의 책임감을 어깨에 거머쥔 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진=unsplash]
늦은 저녁 남의 차를 모는 이유는 하나, 그 사람이 가장이기 때문이다. 가장의 책임감을 어깨에 거머쥔 그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진=unsplash]

개인적으로 대화 중에 시답잖은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것을 꽤나 싫어한다. 맑고 고운 우리 말이 버젓이 있음에도 일부러 영어를 쓰는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엔 좀 덜하지만 한때 정치인이나 학자들 사이에서 ‘워딩’이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말 내지는 표현법 정도로 해석되는 그 단어를 쓰면 있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나없이 그 단어를 차용한 것이었는데 그 덕에 일반인들조차 워딩이라는 단어를 대화 중에 수시로 사용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사실 그게 큰 잘못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런 경향은 우리 실생활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버스나 택시처럼 우리 생활 속에 뿌리박혀 다른 말로 바꿔 쓰는 게 더 이상한 단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 경우라면 가급적 우리말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워낙 어린 시절부터 지녀왔던 생각이라 주변 사람들의 경우, 이 문제로 필자에게 한번쯤 구박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내오다 보니 내 지인들은 은연중에 우리말을 쓰는 게 익숙해져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런 불문율을 나 몰라라 한 한 친구를 얼마 전 만났다. 

“내가 요즘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긱 경제에 관심이 많아졌어, 뭐냐 하면 말이지.”

여느 때라면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구박 한 바가지부터 쏟아냈어야 정상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오른쪽 다리에 걸쳐진 깁스붕대에 얽힌 속사정을 들은 뒤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플랫폼 비즈니스는 바로 대리운전이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대리운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그의 말을 들었을 때는 필자를 위시한 친구 모두가 다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리운전 일이라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건 맞지만 그 친구가 그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솔직히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대외적인 백수지만 그 친구는 불과 몇 년 전까지 대기업 증권사에서 이사로 있던 친구였다. 모아놓은 재산도 적지 않고 제수씨도 자기 사업을 하고 있어 돈 걱정 따위는 애당초 하지 않아야 될 친구였다.

그런 그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런저런 진상을 만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건 바로 책임감이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감, 남편으로서의 책임감이 더해진 결과라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극성이다 싶었지만 내심으론 참 대단하다 싶었다. 어릴 때부터 책임감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녀석이었으니 이해는 갔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 그런다는 건 어지간한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다리의 깁스는 결국 그 책임감이 불러온 화근이었다. 친구 말로는 주변에서 뜬 콜을 먼저 잡기 위해 달리다가 삐끗해서 인대가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덕분에 당분간 대리운전 일은 접어야 했지만 다리가 낫고 나면 다시 할 의향이 200%라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야만 했다.

과연 나는 저 친구처럼 가족을 위해 체면이나 주변의 시선 따위를 무시할 용기가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고민부터 크게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다친 상황에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 제도가 올바를까 하는 생각까지 나아갔다. 아직도 친구는 집 근처 정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일로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랄까. 

여기서 바로 우리가 짚어봐야 할 문제가 대두된다. 적게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200만 언저리에 달하는 대리기사나 택배기사 등 소위 말하는 플랫폼 종사자들을 위한 우리 사회의 배려가 너무도 빈약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일할 땐 근로자, 다치면 개인사업자


논점은 하나다. 대리운전이든 택배기사든 혹은 그 밖의 무엇이든 현재 플랫폼 종사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근로자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 필자의 친구처럼 일을 하다 다쳐도 자신의 돈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올 7월까지는 그랬었다. 지난 7월 1일, 개정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이 시행되면서 탁송기사·대리주차원, 관광통역안내원, 어린이통학버스기사, 방과후 학교강사, 건설현장 화물차주(살수차, 고소작업차, 카고크레인 기사)를 비롯하여 모든 일반화물차주도 산재보험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한 곳이 아닌 여러 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의 경우 ‘전속성’(한 조직·기관에 속해야 함)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보험 가입 대상에서 제외되던 기존 제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난 여론에 직면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이뤄내게 된 셈. 한때 플랫폼 종사자를 외면했던 고용보험 역시 문호를 개방해 한숨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플랫폼 종사자들을 위한 사회적 장치가 충분해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아직도 허점투성이다. 

지난 8월 30일, 플랫폼 노조와 시민사회 연대체 '플랫폼 노동 희망찾기'가 '플랫폼 노동에 사회보험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라는 주제로 연 기자간담회를 통해 알려진 내용을 점검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전 국민 고용보험' 정책에 따라 고용보험은 지난해 1월부터, 산재보험은 전속성 요건 폐지로 올해 7월부터 가입할 수 있게 됐지만 보험 급여가 너무 적고 실업급여는 수급 문턱도 너무 높아 실제 이용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라이더유니온에 따르면 월 소득 300만원인 배달 노동자가 휴업급여를 신청하면 고용노동부 공시에 따라 경비율 27.4%를 제한 '실소득(217만원)'에 70%를 곱한 152만원을 급여로 받게 된다고. 전속성 요건 폐지로 보험 가입 문턱은 낮아졌지만, 최저임금에 맞춰주던 급여액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이러니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일을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실업급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업급여는 수급 자격 충족이 어렵거니와, 관련 행정 미비로 필요한 서류를 떼기도 험난해 그 실효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업주가 실업급여 신청에 필수적인 '이직확인서'를 작성해줄 의무가 있는 일반 근로자와는 달리 반면 플랫폼 노동자는 계약이 끝나거나 일방적 계정정지를 당해도, 플랫폼이나 소속업체가 '노무제공계약 종료 확인서' 발급을 거부하면 실업급여를 신청할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 이러니 그림의 떡이란 푸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의 적용 확대가 기본적으로는 예외적인 조치라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플랫폼 종사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젓이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하지만 그들은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은 플랫폼 종사자들을 챙길 의무가 없는 것이고. 

법이 어떻고 제도가 어떻고를 떠나 분명히 회사에 소속돼 일을 하는 이들을 근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지금의 현실이 올바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불합리함을 타파하기 위해 언급되는 것이 바로 플랫폼 종사자의 권리를 명시한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이다.

몇 해 전부터 도입한다고 말만 무성한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의 현재 위치는 여전히 안개 속에서 표류 중이란 것이 더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2020년말 입법 발표되면서 금세라도 제정이 되는 듯 했지만 올해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설령 통과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은 특별법의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 그것. 특별법은 기존의 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만들어지는 종류의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존의 근로기준법은 플랫폼 종사자들을 껴안을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플랫폼 종사자들을 근로자로 인정할 수 없으니 특별법으로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인데, 이 또한 말이 안 되는 부분이다.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이 어떤 내용을 담게 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근로기준법처럼 포괄적인 부분에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결국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이 지켜줄 부분은 근로기준법에 비해 빈약할 것이라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쉬운 길을 놔두고 왜 이리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답은 간단하다. 플랫폼 종사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면 그뿐이다. 그럼 근로기준법이 보호할 대상이 되는 탓이다.

플랫폼 종사자는 우리 국민이 아니라는 걸까. 늦은 저녁 대리운전을 하는 이도, 이른 새벽 택배차를 모는 사람도 모두 우리의 아버지고 형제고 누이고 동생이다. 우리 가족을 지켜달라는 그 조그만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뭔지 누가 좀 속 시원히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손영남 칼럼니스트
손영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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