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식품의 대표제품인 삼양라면. [사진=삼양식품]
 삼양식품의 대표제품인 삼양라면. [사진=삼양식품]

스위스의 융프라우에 오르면 체르마트에서 컵라면을 무료로 준다. 그냥 무료는 아니고 사전에 쿠폰을 받아야 한다. 남극으로 가는 칠레의 항구 푼타아레나스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신라면 집이 있다. 20여년 전 카프카즈 산맥 북쪽 북오세티아 공화국의 모즈독이라는 생소한 도시를 여행했을 때, 그 도시의 작은 가게에 '팔도 도시락'이 진열되어 있었다.

세상의 가장 극한지역,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구석구석에서도 라면을 만날 수 있다. 여행 중에 라면을 만나면 2023년의 라면은 식품이라기 보다 먼 곳에서 즐기는 고향의 문화 같다. 

필자가 어렸을 때 라면의 이미지는 조금 못 먹는 식사의 사례였다. 먹을게 부족해해서 어쩔 수 없이 먹는 식사. 1986년 아시안게임 육상에서 3관왕을 차지한 임춘애씨는 형편이 어려워 라면을 많이 먹었다고 해서 ‘라면소녀’라 불리기도 했다. (기자들이 어렵게 운동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라면 이미지를 입혔다.)

1977년 비가 많이 와서 하천이 범람이 집이 물에 잠겼을 때, 수제민에게 제공된 구호품 중 하나도 라면이었다. 설날이나 명절에 설탕, 밀가루 외에 보내는 선물에도 라면이 있었다.

한겨울 간식이기도 했고 식량이기도 했다. 석유곤로에 양은 냄비에 라면 하나를 넣고 김치나 파 등을 넣고, 넉넉한 날이면 계란하나 넣고, 불어가는 라면을 먹던 기억, 라면에 스프 뿌려서 먹덩 '라면 땅' 등… 

 1963년 9월 15일 출시된 국내 최초의 라면. [사진=삼양식품]
 1963년 9월 15일 출시된 국내 최초의 라면. [사진=삼양식품]

최초의 라면은 2차대전 후 쌀대신 원조받은 밀가루의 소비를 확대한다는 의도로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가 만들었다. 즉석라면은 1958년 8월 산시쇼쿠산에서 출시했다. 이 때의 라면은 양념이 면에 더해진 형태였고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스프와 면이 분리된 라면은 1962년 묘조식품의 라면이다.

삼양라면이 1963년 9월 15일에 출시되니 일본 출시 후 1년만이다. 개발은 일본에서 했지만 라면의 세계화는 한국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덧 '매운 불닭볶은면'은 유명 유튜버들이 도전하는 한류문화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에서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먹는 장면이 나왔고, 한국 식당이 없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백종원은 라면정식을 만들어 파는 장면이 나온다.

노르웨이에서는 한국전쟁 후 건너간 청년이 만든 ‘미스터 리 라면’이 국민 간식이다. 영국 청년의 유튜브에서는 영국 청소년부터 할리우드 스타들까지 나와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어려운 시절, 식사 대용으로 먹던 그런 라면이 아니다. 

라면같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면 했던 시절이 있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의 한 글귀다. 이 시에 나오는 연탄처럼 뜨거운, 배부른 만족을 줄 수 있는 사람, 라면도 그와 같다. 

라면, 그중 최초로 나온 ‘삼양라면’을 명품으로 여긴다. 1989년 ‘그 일’, ‘그 사건’ 후 사람들의 입맛이 바뀌어 버려 최고의 위치를 놓아 주긴 했지만, 삼양라면의 출시 그리고 성공까지의 여정은 다른 라면과 다르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애정으로 시작되었고, 그 배고픔을 함께 이겨가고 싶은 정부의 지원도 있었다. 이 후의 라면들은 삼양라면의 성공 후 시장을 뺏는 라면이기에 다르다고 한 것이다. 

 1960년대의 삼양라면 제조공장. [사진=삼양라면]
 1960년대의 삼양라면 제조공장. [사진=삼양라면]

1989년 이후 입맛이 변하고 삼양라면의 맛도 변해서 예전과 같이 자주 먹지는 않게 되지만 그래도 삼양라면은 필자에겐 명품이다. 

“솔직히 나는 경쟁사들 의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많이 만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이 없도록 하지고 했어. 그런데 내가 10원을 받으니 다른 업체들이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어요? (중략) 나도 1년 반쯤 됐을 때부터 적자야. 2년이 넘어갈 때는 가지고 있던 보험회사 주식을 다 팔아 3억원 전부를 집어 넣었어요. (중략) 먹지 못하는 사람들한데 애정이 없으면 절대 그렇게 못해요. (후략)”

2006년 4월,  삼양식품 창업자인 고 전중윤 명예회장(2014년 작고)이 생전 언론사와 한 인터뷰의 한 내용이다.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김길 / '전화기 디자이너'가 되려다 초콜릿바와 같은 거 외엔 할 디자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 현재 인터넷기업, 교육기업 전략실 경험을 살려 사업컨설턴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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