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면 나를 위로해주는 것들이 있다. 가족들의 걱정스런 위로, 친구들의 위악적인 구박 그리고 뜨끈한 국물 한 모금이 그렇다. [사진=픽사베이]
힘들 때면 나를 위로해주는 것들이 있다. 가족들의 걱정스런 위로, 친구들의 위악적인 구박 그리고 뜨끈한 국물 한 모금이 그렇다. [사진=픽사베이]

쫄면, 떡볶이, 마라탕, 스파게티. 그리고 탕후루.

요 며칠 사이 내가 먹었던, 아니 먹어야만 했던 음식들이다. 크게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먹어야하는 음식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먹었다. 함께 일하는 젊은 친구들 때문이었다.

최근 진행하는 일 때문에 젊은 친구들 몇몇과 함께 일을 해야 했고 점심과 저녁을 같이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메뉴들은 그 친구들이 먹고 싶다던 음식이었고.

크게 내키지 않는 먹거리들이었지만 협업을 하다보면 일을 하는 것 못지않게 같이 앉아 밥을 먹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의견을 따랐던 거였다. 물론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 친구들이 강요하거나 재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소위 말하는 자의반 타의반이랄까. 그들이 나보다 앞서 메뉴를 말했었고 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맘 같아서는 순대국밥이거나 소머리국밥 혹은 설렁탕을 먹었으면 했지만 그 친구들에겐 그리 선호되는 메뉴가 아니란 걸 알았기에 흔쾌히(대외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들과 동행했던 거였다.

이 사회에서 꼰대란 바퀴벌레 혹은

아메바와 동급의 존재가 아니든가

이렇게 말하면 꽤나 줏대 없는 사람처럼 보일 거란 걸 안다. 오해할 상황이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난 내 의견을 말하는 데 크게 거침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친구들한테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다수의 의견을 뒤로 하고 순대국밥이나 소머리국밥, 설렁탕 따위를 먹으러 가지고 그랬다면 행여나 꼰대처럼 보여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물에 밥을 마는 음식들, 그러니까 국밥류는 꼰대들의 전유물이거나 혹은 소울 푸드란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내가 국밥을 먹으러 가자고 조금만 힘주어 말했다면 난 자칫 '내추럴 본 꼰대'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그건 싫었다. 이 사회에서 꼰대란 바퀴벌레 혹은 아메바와 동급의 존재가 아니든가.

그러니 겨우 한 끼의 즐거움을 위해 내 꼰대력을 증명해 보일 지도 모를 모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거였다. 안다. 나는 꼰대다. 나이로 보나 구력으로 보나 내가 꼰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래서 더 망설여졌다. 투철한 자기 객관화를 거쳐 스스로가 꼰대임을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만천하에 공표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때론 원치 않은 일을 하기도 하는 거고. 그럴 때마다 안타까워진다. 꼰대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매도되어야 하는 일인가 싶어서다. 이 자리에서 꼰대론을 설파하고 싶진 않으니 일단은 건너뛰겠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려 한다.

되도 않는 오지랖, 상대의 의견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맹렬한 의견 관철, 분위기 파악 못하고 자기만 즐거워지는 일에 목숨 거는 식의 전형적인 꼰대질은 나도 당연히 사절이다. 그러나 음식이나 취향을 이유로 꼰대로 몰리는 작금의 사회 분위기는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 국밥을 좋아하면 경증의 꼰대, 삭힌 홍어를 좋아하면 중증의 꼰대 식으로 분류되는 것이 정말로 타당한 것일까.

 [일러스트=프리픽]
 [일러스트=프리픽]

이런 내 의견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국밥 러버를 국밥충이라 부르며 꼰대의 소울 푸드인 양 여기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형성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장 인터넷 창에 국밥과 꼰대를 키워드로 집어넣으면 그에 관한 각종 설명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젊은 세대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직접 체감한 나로서는 그 사실을 쉽게 부정할 수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면 웬만한 비상시국이 아닌 다음에는 절대로 국물에 밥을 마는 행위를 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음식 취향이야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식으로 나뉘어질 수 없는 일이란 건 자명하다. 단지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지금의 흐름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않는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자기와 다른 상대를 틀린 것으로 인식하고 헐뜯고 배척하는 공기 말이다. 한편으론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대부분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일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식인들이 대화와 타협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의견과의 절충점을 찾는 일이야말로 작게는 개인의 안녕 크게는 세계의 평화를 이끄는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너무 거창해지고 있지만 음식에서조차 그런 논란이 빚어지는 게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내가 단지 국밥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대접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난 왜 이렇게까지 국밥을 좋아하는 걸까?

따지고 보면 내 국밥 사랑은 역사와 전통이 깊다. 다른 친구들이 사탕의 맛에 환호하던 예닐곱살 시절에 처음 국밥을 만났으니 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대충 그때가 맞을 것이다. 아마 우리 엄마와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그 남자(?)가 사줬을 것임이 분명하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국밥에 목을 매는 사람이었고 누구보다 내게 좋은 걸 먹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내 인생 첫 국밥을 사줬을 것도 분명하다. 처음 먹어본 국밥은 설렁탕이었지 싶다. 

국밥충인 거 인정한다. 꼰대인 것도 인정한다.

그래도 포기할 수도, 포기하지도 않을 거다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뜨거웠던 국물에 담겨져 나온 밥을 보며 특별한 감상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처음 그 맛이 어땠는지도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 조그만 아이가 어른들이나 먹을 설렁탕을 먹고 “아 시원하다”고 말하는 순간, 아빠를 위시한 주변인들의 폭소가 터졌던 그 장면. 사실 정말 시원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아빠가 평소 하는 걸 흉내 낸 것뿐이었는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을 본 것처럼 배를 잡고 웃음을 토해냈다. 그게 좋았던 걸까?

그날 이후 난 “아 시원하다”라는 추임새를 토해내기 위해 수시로 아빠를 졸라 국밥집을 드나들었다. 왜 시원한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국밥의 매력을 조금씩 느껴가면서 서서히 난 국밥 마니아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에 올라가면서 술을 처음 접한 이후, 국밥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결국 이젠 국밥 없이는 못 사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고.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 완쾌 판정을 받음과 동시에 가장 먼저 발길을 돌려야 하는 곳이 국밥집이 되어버렸고 슬픈 일을 겪고 나서 소주 한 잔이 그리울 때 옆자리를 채워야 하는 그런 대상이 국밥이 된 거다. 그러다보면 허한 속이 채워지고 속이 채워지고 나면 인생 뭐 있나 싶어 헤헤거리게 된다. 제 아무리 사람들이 꼰대라고 놀려도 국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좋다. 국밥충인 거 인정한다. 꼰대인 것도 인정한다. 그래도 포기할 수도, 포기하지도 않을 거다. 목을 타고 흐르는 소주 한 잔의 짜릿함, 그런 다음 알콜로 인해 달궈진 식도와 위장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뜨끈한 국물의 위로만큼 나를 안심시켜 주는 일이 세상에는 없으니까. 이게 꼰대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라면 난 기꺼이, 결연히 꼰대로서의 길을 갈 것이다. 억울하냐고? 전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머지않은 당신들의 미래란 걸 아는 때문이다. 

꼰대로서 한마디 조언하자면 말이지. 언젠가 인생이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러면 소주가 필요해질 거고 또 그러면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이 애달프게 그리워질 거다. 믿기 싫을 수도 있지만 믿어야 할 걸. 삶이란 게 그런 거더라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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