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팥죽을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력 착취를 당하면서까지 만들었던 음식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일러스트=이하나 기자]
내가 팥죽을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력 착취를 당하면서까지 만들었던 음식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일러스트=이하나 기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특정 시즌이 되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음식이 있게 마련이다. 11월 11일이면 동네 편의점 앞을 가득 메우는 빼빼로가 그렇고 복날이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치부되는 삼계탕이 또한 그렇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에 가장 각광받는 먹거리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케이크다. 예전보다는 덜하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과업계 최고의 대목으로 꼽히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걸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싶다.

한때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기간에 판매되는 케이크 양이 연간 판매량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케이크가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먹거리임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솔직히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일날에나 먹을 법한 케이크가 아니든가. 자기 생일도 아니고 예수님 생일에 왜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줄을 서가며 케이크를 사는 건지. 그나마 기독교 신자라면 억지로라도 이해를 하겠지만 그도 아닌 사람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는 건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별스런 성정이 크게 작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남들이 하는 건 곧 죽어도 나도 한다는 그 마인드 말이다. 나쁘게 보면 극강의 부화뇌동이겠지만 한편으론 그런 마인드가 대한민국을 세계 유수의 선진국으로 만든 원동력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남들이 하는 건 곧 죽어도 하고 말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실현하려면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우리집 팥죽은 솥 대신 양동이를 채워야 하는 수준이라 새알심 역시 거짓말 좀 보태 수백 개 가까이 필요한 수준이다.

잡설이 길었다. 암튼 크리스마스엔 케이크가 국룰이란 이야기다. 그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내 카카오톡 선물함에 쌓인 선물 내역이다. 평소에는 별다방 쿠폰 류의 커피 선물이 대세를 이루지만 유독 12월이 오면 케이크 선물이 부쩍 늘어나는 게 그 증거다.

혹시 자랑하는 거냐고? 그럴 수도. 암튼 그리 나쁘지 않게 살아왔는지 그런 선물들을 주는 지인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수시로 선물을 상납한 그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다. 크크크.

근데 죄송스러운 건 그렇게 선물 받은 케이크들을 온전히 먹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커피나 음료를 곁들여 한 번에 먹기 좋은 조각 케이크라면 몰라도 온전히 원형을 이룬 그 큰 케이크를 제대로 먹을 자신이 없는 탓에 케이크 대신 빵으로 바꿔 먹기 일쑤였던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어 수시로 케이크를 선물한 그들에게 죄송함을 표한다. 그래도 덕분에 잘 먹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주길. 안다. 당신들의 정성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크리스마스 날에라도 케이크를 먹어야 하겠지만 정작 그 날 먹어야 할 우리 집만의 시그니처 메뉴 때문에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그걸 안 먹으면 왠지 크리스마스 기분이 안 들어서 그래.


◆ 동짓날 만들어 크리스마스 날까지 먹는 이유


다들 알겠지만 크리스마스 3일 전인 12월 22일이 동지 아닌가. 동지를 대표하는 음식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것이 있을 터. 바로 팥죽이다. 크리스마스를 무려 3일이나 앞둔 시점에 만드는 음식인 팥죽 핑계를 대냐 싶겠지만 정말로 핑계가 아니다.

동짓날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우리집 밥상을 장식하는 메뉴는 팥죽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이가 바로 우리 모친이다. 우리 모친 1인분이 일반적인 어머니 기준 5인분 정도라면 이해가 가실 런지. 손 크기로 정평이 자자한 우리 모친 왈, ‘음식은 모자라는 것보단 남는 게 백 번 낫다’라나.

이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친 덕택에 웬만한 음식은 하루에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심한 것이 팥죽이었다. 곰탕 끓일 때나 쓰는 양동이에 팥죽을 끓인다면 말 다했지 뭐. 좋다. 그래서 당신 속 편하다는 데 자식 된 입장에서 토를 달 이유는 없겠지.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팥죽에 필수적인 것이 새알심이다. 찹쌀로 만들어야 하는 새알심은 100% 가내수공업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생산 가능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 다른 집처럼 대접 한 그릇 정도의 새알심이 필요하다면 엄마 혼자서 다 만들겠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집 팥죽은 솥 대신 양동이를 채워야 하는 수준이라 새알심 역시 거짓말 좀 보태 수백 개 가까이 필요한 수준이라는 게 사건의 발단이다.

그 많은 새알심을 혼자 제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식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통에 동짓날 긴긴밤을 새알심 빚느라 밤을 새워야만 했던 설움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모른다. 

[사진=공유마당_박동식]
[사진=공유마당_박동식]

내가 팥죽을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력 착취를 당하면서까지 만들었던 음식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잖은가. 그랬던 내가 지금은 그 누구보다 팥죽에 목을 매고 있다.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나간 아빠 때문이다. 팥죽을 정말 좋아하는 이였거든. 엄마가 그렇게 많은 양의 팥죽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아빠였다.

사실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이긴 하다. 평소 우리 모친 18번이 ‘남편 복 없는 X이 자식 복이라고 있을까’ 였으니까. 자식들이 엄마 말을 안 들을 때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레퍼토리였달까. 이 말만 들으면 남편에게 서운한 게 차고 넘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안 그랬다.

돌아가시기 직전엔 더했지만 평소에도 누구보다 남편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이 바로 엄마였고 때문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인 팥죽을 솥이 아닌 양동이에 끓이는 사람 역시 엄마였다. 

그 사실을 안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아빠가 투병하는 동안 수시로 팥죽이 올라왔고 영문을 몰라 하던 내게 아빠의 최애 음식이 팥죽이라는 것을 고모가 귀띔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많은 양의 팥죽을 만드는 이유가 이해가 됐으니까. 그토록 좋아하던 팥죽이었지만 정작 아빠는 그 무렵엔 그조차도 몇 숟가락 뜨는 게 다였다.

그때마다 도끼눈을 뜨고 아빠를 채근하던 이 역시 엄마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구박을 하는 것처럼 보일법한 장면이었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안타까워서 그랬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 아빠는 당신 표현대로라면 ‘자갈 씹는 느낌’임에도 억지로 꾸역꾸역 몇 숟가락 더 넘기신 것일 테고. 얼마만큼의 팥죽이 더해졌을까. 엄마와 자식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팥죽을 먹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은 누구나 하게 마련이다. 그게 인간사고 신의 섭리니까. 견딜 수 없는 고통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는 조금씩은 옅어지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제 동짓날 만든 팥죽이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질 이유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졌다는 점이다. 팥죽을 좋아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그게 맞다. 엄밀히 말하면 만드는 엄마도, 툴툴대는 자식들도 팥죽보다는 전복죽을 더 좋아한다. 내 배달 앱이 그를 증명한다. 

자칫 크리스마스까지 먹으면 족했던 팥죽의 양이 신년까지 갈 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오늘은 소금으로 간하고 내일은 설탕을 쳐서 먹으면 그뿐일 일이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당신의 손이 크다는 핑계를 대며 양동이에 팥죽을 끓일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우리 집 연례행사인 ‘밤 새워 새알심 빚기’는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단순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이젠 거의 종교행사처럼 되어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옳겠다.

새알심 하나하나를 빚어가며 누군가는 아빠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는 남편 흉을 보는 그 순간은 때론 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는 걸 보면 종교행사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지경이라는 말이 더 옳을 지경이다. 

뭐든 상관없다. 때론 눈물을 훔치고 또 때론 박장대소하는 그 순간만큼 소중한 건 없다 느껴지니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을 추억하는 일만큼 행복한 일 역시 없다고 믿으니까. 때문에 우리 가족 그 누구도 이젠 새알심을 왜 이리 많이 빚냐며 투덜대진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빚지 못해 안달이라면 모를까.

문제는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칫 크리스마스까지 먹으면 족했던 팥죽의 양이 크리스마스를 넘어 신년까지 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아닌 위기감이 드는 정도가 걱정의 전부지만 말이다. 그래도 좋다. 오늘은 소금으로 간하고 내일은 설탕을 쳐서 먹으면 그뿐일 일이다. 

충만한 사랑이 온 대지를 뒤엎는 그 날, 우리 식구들은 3일 전 끓여놓은 팥죽 안에서 새알심을 찾는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 아기 잘도 자는 그 밤, 우리는 우리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던, 자기 자신보다 소중하다 생각하며 살아왔던 한 사람을 추억하며 팥죽을 먹는다. 한 해의 가장 성스러운 밤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음식이 팥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나현 칼럼니스트
김나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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