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하나 기자]
 [일러스트=이하나 기자]

“지금이야 노가리와 오징어를 제치고 마른 안주계의 기린아로 등극한 먹태지만 불과 이십여년 전만 해도 먹태는 이런 자리에 등장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거 알아?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먹태는 황태를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불량품이야. 황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탄생한 것이 먹태란 말이지. 황태를 만드는데 가장 필요한 게 날씨야. 알지 강원도 날씨. 눈 내리고 바람 부는 강원도의 혹독한 날씨를 겨울 내내 오롯이 견뎌야 탄생하는 것이 황태라고. 문제는 날씨라는 게 예측불가하다는 거지. 한창 추워야 할 시점에 날씨가 풀려버리면 결국 껍질이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속이 제대로 마르지 않게 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먹태라고.”

술을 마시다말고 갑자기 먹태 찬양론을 펼치는 나를 바라보는 네 개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고 있었다. 나도 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스스로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 그녀, 그러니까 우리 사무실의 똑순이 A양이 자신을 스스로 실패작이라 부른 직후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뇌관을 건드리고 만 때문이었다. 결국 폭발했다.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시간을 몇 시간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되돌리고 싶던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최근 들어 A양이 부쩍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잦아졌고 때문에 상사들에게 수시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곤 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술자리를 갖기로 했고 나와 A양, 그리고 또 한 명이 만나 술집에 자리를 깐 거였다.

예전만 해도 먹태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어.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생맥주집의 절대 안주로 올라선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처음에야 그럴 수 있다 했어요. 사람 살다보면 그럴 수 있죠. 근데 밤낮 가리지 않고 그러니 참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녀의 말에 따르면 처음엔 좋게 좋게 이야기하는 걸로 층간 소음 문제를 풀어보려 했는데 점차 서로간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결국 대판 싸웠다는 것.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녀 스스로 자기 비하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는 제가 싫더라고요. 저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사람들한테 반말에 쌍욕까지 하고 있는 걸 보고는 제가 정말 나쁜 인간처럼 느껴졌어요. 저 진짜 못됐죠? 저 진짜 실패작인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나를 위시한 우리 모두가 그녀가 얼마나 착한지를 잘 알고 있다. 하루 이틀 그녀를 보아온 것이 아니니 하는 말이다. 그런 그녀가 그리 행동했다는 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 아닐까.

아는 사람은 안다. 층간소음에 시달리기 시작하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걸.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으니 그게 아니라고 열심히 그녀를 위로할 밖에. 그럼에도 좀처럼 그녀의 자기 비하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때 등장한 생맥주와 마른안주가 나를 터트리고 말았다.

◆ 북어도 황태도 먹태도 모두 명태일 뿐

이 나이까지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누군가의 슬픔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입은 닫고 귀는 여는 거였다. 어쭙잖은 위로나 시답잖은 충고 같은 것들이 누군가의 슬픔을 달래는데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몸소 느낀 뒤의 결론이랄까.

그래서 웬만한 일이라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곤 하는데 이번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자기비하가 극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우울증으로 내처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생 같은 아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니가 왜 실패작이야.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너 아닌 누구라도 층간소음에 시달리고 나면 반말하고 욕도 하고 그래. 나라고 안 그랬을까. 너 이게 뭔 줄 알아?”

내가 그녀에게 들어 보인 것은 우리가 주문한 먹태였다. 수해 전부터 생맥주집의 최강 안주로 등극한 먹태를 들어 보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실패작이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임을 보여주기 위해 한때 실패작으로 오해받던 먹태의 어생(漁生)을 이야기해주고자 했던 거였다.

그렇게 때 아닌 오지랖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그게 어울리는 위로였는지 지금 이 순간도 의아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된 먹태 찬양이었다. 

“예전만 해도 먹태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어. 때문에 가축 사료로 활용될 만큼 천덕꾸러기로 대접받던 존재였다고.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생맥주집의 절대 안주로 올라선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일단 가격이 싸다는 것이 첫 번째지. 원가 절감이 생명인 업주들이 싼 가격에 황태나 노가리를 대신할 존재를 찾던 차에 먹태가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때문에 테이블 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거지. 그러나 그게 다였다면 지금처럼 먹태의 전성시대는 없었을 거야.”

 [사진=뉴스캔 DB]
 먹태는 황태를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불량품이었지만  맥주 최고의 안주로 사랑받는 메뉴다. [사진=뉴스캔 DB]

그 말 그대로였다. 단순히 가격 때문에 먹태가 생맥주의 영혼의 파트너가 된 건 아니었다. 먹어본 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듯 먹태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안주다. 거무튀튀한 껍질을 벗기면 드러나는 속살은 황태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데다가 황태보다 덜 마른 덕에 씹는 맛이 상대적으로 부드럽다.

여기에 청양고추와 간장을 더한 먹태 전용 마요네즈 소스를 곁들이면 이보다 더 맥주와 궁합이 맞는 녀석을 찾기가 힘들어질 정도다. 

이런 이유로 한때 실패작 내지는 불량품으로 불리던 먹태가 인기 절정의 스타로 등극한 것이다. 최근에는 없어서 못 먹는다는 먹태깡 붐이 일만큼 먹태는 그렇게 우리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때문에 이젠 더 이상 누구도 먹태를 실패작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거였다. 세상에 실패작 따위는 없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니 너도 스스로를 실패작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황태도, 코다리도, 북어도, 생태도, 먹태도 따지고 보면 다 명태일 뿐이다. 안주가 되어 짜악짝 찢어져 몸이 없어져도 만족한다는 명태처럼 감사해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겠다. 

극한의 오지랖을 동반한 간절한 내 바람과는 달리 아무래도 내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말은 안 했지만(내가 위로해주고자 했던 A양과 또 다른 참석자보단 내가 상관이었던 때문이었겠지) 그네들의 얼굴엔 도통 모르겠다는 미지근함이 서려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하긴 그 긴 시간 먹태론을 들먹거린 나조차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생맥주 4000cc와 먹태를 해치우고 나서 각자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 내가 왜 그랬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볼 이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며칠 전 참석한 고등학교 송년회가 문제였다. 이상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이런 모임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주로 참석하게 된다.

특히 우리 나이 또래라면 더더욱 그런 경향이 짙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는 주식으로 하루 만에 이천을 벌었네, 사놓은 아파트가 5억이 뛰었네 따위의 이야기를 주구장창 늘어놓는 것을 서너시간 듣다보면 자연히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것이 느껴지게 된다. 내가 못난 탓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스스로가 너무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건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 사실을 A양의 실패자 운운을 들으면서 마침내 폭발하고 만 것이었다. 참 못났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런 걸로 폭발한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이 거기에 이르기까지 기울인 노력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난 그러질 못했다.

백화점에서 팔리는 비싼 황태가 되기 위해서 그 겨울 내내 추위와 바람과 폭설을 견뎌내야 했던 그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내가 그래서는 안 되었던 거였다. 생태인 그들을 시기하고 황태인 그들을 비웃고 있었던 나는 스스로를 먹태라고 칭한 자격조차 없는 거였다. 새삼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황태도, 코다리도, 북어도, 생태도, 먹태도 따지고 보면 다 명태일 뿐이다. 모쪼록 다가오는 2024년에는 어느 가난한 시인의 안주가 되어 짜악짝 찢어져 몸이 없어져도 만족한다는 명태처럼 감사해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김나현 칼럼니스트
김나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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