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로 받고 말로 주는데도 즐겁지 아니한가

 제주 소재 식당의 방어회. [사진=공유마당_채지형]
 제주 소재 식당의 방어회. [사진=공유마당_채지형]

전 세계 사람들이 앞다퉈 프랑스를 '미식의 나라'라고 부르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코끝이 떨어져나갈 것 같은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 하나 먹겠다고 발을 동동거리며 긴 줄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본다면 그런 생각을 고쳐먹어야 옳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만큼 음식에 진심인 민족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맛집 앞에 길게 장사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어디야? 우리 앞에 세 팀 남았어. 빨리 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한 친구가 퇴근하고 올 동안 좀 더 시간이 자유로운 내가 맛집 줄을 서기로 했다. 바로 겨울의 별미로 불리는 방어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방어의 제철인 이 겨울, 아무런 생각 없이 소위 말하는 방어 맛집을 찾았다간 몇 시간을 기다려도 방어 맛을 볼 수 없기에 족히 1시간여에 가까운 줄 서기를 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근래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덕에 약간 방심한 게 문제였다. 온도가 떨어진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 

준비를 하긴 했다. 몸 이곳저곳에 핫팩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게 그것.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한겨울 강추위를 막아내기란 애당초 무리였다. 타고나기를 뼈대 높은 양반집 후손인 내가 발을 동동 구르는 잔망스러움을 시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추위는 지독했다.

평소 맛집 앞에 줄 서는 사람들을 안타까이 여기던 나였지만 이날만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그 친구와의 방어 시식회는 한 해를 여는 일종의 루틴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10여년 세월이다. 

그만큼 방어를 좋아하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영하 10도의 추위 속에 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통통하게 오른 살에 지방이 듬뿍 채워져 씹을 때마다 꼬소함을 주는 게 별미이긴 하지만 그게 1시간의 기다림을 인내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이 길고 긴 기다림을 수용하게 하는 건 음식의 맛이 아닌, 친구와의 우정이라고 해야 옳다. 

다들 알겠지만 친구라고 다 같은 무게를 지니지는 못한다. 열명의 친구가 있다면 그 안에서 조금 더 친하고 조금 덜 친한 이들이 존재하게 마련인 게 친구와의 관계다. 지금은 감히 베스트프렌드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됐지만 불과 10여년 전, 그러니까 지금의 방어 시식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친구와 나는 조금은 덜 친한 사이였다. 적어도 둘이 따로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사이는 아니었던 수준이랄까. 그런 친구가 지금의 베프가 된 계기가 바로 방어였다.

엄마의 생일이 다가왔고 내 사정을 모르던 엄마가 지나가는 말처럼 방어 이야기를 했다. 매년 엄마의 생신 때면 서울의 유명 맛집을 골라 저녁을 먹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었으니까.

10여년 그 즈음, 당시 여러 이유가 겹치면서 내 생애 최악의 보릿고개에 접어들게 되었다. 정말로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게 된 것. 버스 타는 돈마저 아까울 정도로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 그 때, 엄마의 생일이 다가왔고 내 사정을 모르던 엄마가 지나가는 말처럼 방어 이야기를 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 전까지 매년 엄마의 생신 때면 서울의 유명 맛집을 골라 저녁을 먹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었으니까.

그러니 엄마가 방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당연히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다음 달 카드 대금을 연체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 된 도리로 그 정도는 해야 했으니까. 걱정은 걱정이고 일단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방어집을 찾는 게 먼저였다.

개인적으로 방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다 보니 가본 집이 없었으니 이리저리 수소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 결과 낙점한 곳이 홍대 근처에 있는 방어집이었다. 워낙 장사가 잘 되는 집이다 보니 방어의 최성수기인 겨울에는 예약조차 거부하는 그런 집이었다. 싫으나 좋으나 일찍 가서 줄을 설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날, 그러니까 엄마를 모시고 방어를 먹기로 한 그날, 일이 생겨 미처 줄을 설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그 엄동설한에 노모를 길거리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깟 방어 한 점 먹겠다고 노모에게 감기를 선사할 수도 없고 또 한편으론 딸래미랑 맛있는 방어 먹으러 간다고 잔뜩 들뜬 엄마를 실망시킬 수도 없었으니 말 그대로 진퇴양난 그 자체였다. 바로 그때 떠오른 게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친구 회사가 내가 고른 방어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말 친한 친구였다면 당장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할 수도 있었다. 친구 사이에 그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근데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당시만 해도 그 친구랑은 그리 가까운 때가 아니었다.

그런 친구한테 전화로 방어집 줄 서기를 부탁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아마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었다면 방어 먹기를 포기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을 거다. 그러나 그게 엄마와의 생일 잔치였잖은가. 몇 번을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걸었다.

“저기, XX아. 나 부탁이 있는데...”

정말 하기 힘든 말을 끄집어냈다. 근데 놀랍게도 그 친구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누구랑 가는 것인지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나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 엄마 생신인 것하며 엄마가 방어를 먹고 싶다고 말했던 것, 그리고 해마다 엄마 생일에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는다는 것까지 꼬치꼬치 설명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마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당황한 순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전화를 끊고 달아오른 얼굴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하고 방어집으로 갔을 때,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울 소재 식당의 방어회. [사진=공유마당_채지형]
서울 소재 식당의 방어회. [사진=공유마당_채지형]

엄마가 친구와 함께 방어집에 들어가서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한 때문이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광경이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인기 많은 방어집을 상징하는 기다란 줄을 고려한다면 채 입장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미리 엄마에게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거란 메시지를 남기기는 했다. 엄마는 당연히 괜찮으니 천천히 오라고 했었다. 그게 친구가 엄마와 같이 있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친구니 각자의 집에 가보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친구도 엄마도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했을 거란 선입견 때문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엄마 말로는 친구가 먼저 엄마를 알아봤다고 했다. 그게 더 신기했다. 아마 그 친구가 여러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 온 적이 두서너번 정도 있었을 테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십여년도 더 지난 일이었으니 엄마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게 정상 아니었을까. 나라면 그 친구의 어머니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테니 당연히 그 친구도 그랬을 거라 생각하는 게 합리적인 추론에 가깝다. 

친구는 아니었다. 마치 어제 본 아이처럼 엄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너무도 미안했다. 그래서 같이 먹자는 이야기까지 했지만 친구는 두 사람이 오붓하게 먹으라며 엄마에게 인사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날 방어를 무슨 정신에 먹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 놀라운 건 족히 십여만원에 가까웠던 방어값까지 친구가 미리 계산을 해두고 갔다는 거였다. 

당시, 내 경제 사정이 아주 친한 친구 몇몇에게는 알려져 있던 상황이긴 했다. 그 이야기가 친구 귀에까지 흘러간 거였고 그래서 미리 계산을 했다는 게 나중에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내가 놀란 것과는 별개로 엄마는 친구의 칭찬을 침이 닳도록 한 건 당연했다. 그러면서 좋은 친구를 가진 나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너무 계면쩍었다. 나라면? 난 그런 생각조차 못하지 않았을까. 친구란 게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지를 곱씹어보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친구는 퇴근 시간보다 더 빨리 가게 앞으로 가서 줄을 섰다.

정시에 퇴근을 해서 줄을 서면 나와 엄마가 한참을 더 기다릴 거란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이후 일어난 일은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겠다. 친구를 만나 감사를 표하고 사정을 듣고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린 그런 모든 과정은 애써 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도 꼭 하나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날 친구는 자신의 퇴근 시간보다 더 빨리 가게 앞으로 가서 줄을 섰다고. 평소 오가며 봐왔던 방어집의 기다란 줄을 익히 알고 있었던 친구는 자신이 정시에 퇴근을 해서 줄을 서면 나와 엄마가 한참을 더 기다릴 거란 생각을 했고 그래서 회사에 눈치를 보면서까지 먼저 와서 줄을 섰다는 것. 덕분에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엄마와 가게 안에 들어가 있었던 거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라면 어땠을까? 

그 날 이후, 난 그 친구와 많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위기에 처했던 경제 상황은 여러 지인들의 도움과 운이 따라준 덕에 오래지 않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방어 시식회는 시작되었다. 물론 언제나 계산은 내가 한다. 친구가 반반씩 내자거나 혹은 격년으로 내자고 성화지만 난 그럴 생각이 1도 없다.

내 평생 남은 기간 동안의 방어회 계산은 내 몫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이 놈의 줄서기만은 좀 나눠가지고 싶다. 아직도 회사 생활을 하는 친구는 퇴근 시간을 준수해야하지만 나야 나름 시간 분배가 자유스럽다는 이유로 매해 줄서기를 전담하는 것.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너무 춥다. 왜 방어 제철은 봄이거나 가을이 아닌 건지. 이 추위를 견디는 방법은 단 하나다. 열을 내는 것이 그것이다.

“야, 이 X아. 빨리 안 와? 이제 다음 순서라고. 너 빨리 회사 관 둬. 내년부터는 니가 줄을 서라고. 알았냐?”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났지만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있는 이 모습을 친구는 보지 않기를. 

김나현 칼럼니스트
김나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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